Cinematic Region in Shanghai
[Cinematic Region]-KIm Tae Eun Media Art solo Exhibition
10,Dec - 30,Dec,2009
Unit 125-127, KIC art center, Jiangwan stadium
234 Song Hu road, 200433 Shanghai
[Cinematic Region]-金泰恩 個人展2009年12月10日~12月30日
上海五角场 淞沪路 创智天地 江湾体育场123 -127单元
创智天地 艺术中心
기획; 최란아, 김채미정
주최; KIC Art Center
후원; 경기문화재단
인간이 부재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
글. 이선영(미술평론가)
http://www.daljin.com/02.730.6214.html
[cinematic region] 전은 영화, 또는 영화적 인생의 단면들을 세트장같이 연출된 장소, 직접 찍은 영화와 시나리오, 영화의 메카니즘을 예시하는 장치 등을 통해 보여준다. 이 전시는 테크놀로지와 서사를 연결시켜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김태은의 작품에서 서사는 선적이지 않고 구조적이다. 서사는 기술 이후에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안에 내포되어 있다. 서사는 작품의 구조적 형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둑한 지하전시장이든 조명이 밝은 1층 전시장이든 영화적 세트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들려주는 모종의 이야기는 인간이 아닌 사물을 통해, 또는 배우가 아닌 소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밤중에 조명을 켜고 나무숲을 찍은 작품 [S#.on the mountain]처럼, 자연 역시 배우 역할을 맡는다. 난데없이 한껏 조명을 받은 나무들은 평온한 휴식을 방해받고 화들짝 놀란 모습이다. 그것은 인공조명을 통해 밤낮없이 자연을 착취하는 현대적 소비체계를 떠오르게 한다. 나무가 거기에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인 것이다. 김태은은 기괴해진 나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적 시점을 동시에 낯설게 만든다. 작가는 연출자, 또는 감독이 되어 사물을 배치하고, 사물은 인간보다 더 호소력 있고 강력하게 어떤 삶의 상황을 표현한다. [S#....]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들은 실제로 영화를 찍곤 한다는 어떤 집의 안팎을 영화를 찍을 때처럼 조명장치를 하고, 조명기구까지 드러난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조명은 마당이나, 방, 부엌 등을 비추고 있지만, 장면은 무인지경이다.
나름대로 아담하고 깔끔한 집, 또는 무대, 또는 세트에서 비록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그 속에서 펼쳐질 중산층적인 삶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간에 어느 지점에서 어떤 물건을 사용할지를 계측하여 이익을 내려는 상품사회에서 세트 화된 풍경은 결코 자연스러운 장면이 될 수 없다. 기성 영화 장면들이 나오는 배경에 국기들이 깔려 있는 작품은 영화의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다국적 자본의 배후를 드러낸다. 엄청난 이익을 내는 영화는 많은 대중에게 소비되어야 하는데, 대량 소비는 어김없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의 호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표의 배열은 의미심장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한 거울이 사실은 좌우가 바뀐 상인 것처럼, 무엇인가를 재생산하는 매체에는 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특히 부분 부분들을 찍어 연결하는 영화적 형식은 반영이 아니라 구성이며, 구성은 곧 해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작품 [acceptable obscura]는 뚫린 구멍을 통해 전명의 광경을 화면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거꾸로 선 장면과 바로 선 장면이 입자가 되면서 교차된다. 마치 모래시계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모습은 시간예술로서의 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상과 공간을 담는 영화의 방식을 예시한다.
거리에 설치된 조명장치를 피해 걸어가는 행인들을 찍은 작품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송수신기로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이나 다운받아 볼 수 있을 만큼 영화소비에 친숙한 현대인이 막상 그것이 생산되는 현장은 매우 낯설어하고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역사상 어떤 체제도 자본주의 사회처럼 생산과 소비의 괴리를 벌인 체제는 없다. 이 괴리를 얼마큼 느끼는가에 따라 인생관도 달라질 것이다. 죽어라 생산하지만 소비의 권리는 그만큼 주어지지 않는 예술가나 노동자에게 세상은 다소간 가혹하다. 대중들은 지금도 수많은 엿보기 장치를 통해 타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은 조금도 침해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부분 조명 받는 삶을 갈구하면서도 조연이 되기는 싫어한다. 작품 [left cinema-right cinema]는 작가가 찍은 7분 분량의 16mm 필름으로 경첩같이 꺽인 두 모니터에서 영화와 실제상황이 동시에 상영된다. 두 ‘영화’의 배경은 같지만, 카메라를 인식하고 있는 배우와 카메라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둘 다 평범한 장면이고 언뜻 구별도 안 간다. 쳇바퀴 도는 듯한 코드화된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CCTV처럼 구성되지 않은 화면을 봐야하는 순간은 감시나 범죄의 재구성 같은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그 때문에 구성되지 않은 비영화적 장면 역시 만들어진 장면 못지않은 긴장감이 내재한다. 오히려 일상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자연스러움을 연출한 영화적 장면이 진부해 보인다.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 [electric seesaw]는 벽면에 붙은 시나리오 [살인광은 미녀를 좋아해]--그것은 비 오는 날에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과 고시원에 기거하는 인간 군상들의 삶의 단면을 짧게 스케치 한다--때문인지, 즉물적이면서도 음침한 삶의 광경에 대한 상징처럼 다가온다. [electric seesaw]는 시소의 양 끝에 조명 등 같은 밝은 전구가 달려 있고 반 투명판이 정해진 모노레일을 따라 기계음을 울리며 시소 양 말단을 향해 왕복한다. 나무와 쇠, 감속모터로 이루어진 육중한 시소는 모터로 움직이는 확대렌즈가 시소 양 끝을 향해 움직이며 무게중심의 변화를 일으킨다. 광센서가 확대렌즈의 운동방향을 바꾸어 주어 서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변경되는 무게중심은 시소를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광센서와 모터로 작동하는 이 특별한 시소는 시소가 가지는 본래적인 상호성과 달리, 계속 힘겹게 올라가는 과정만이 이어진다. 마치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힘겨운 일을 처음부터 무한 반복해야 하는 운명이다. 정해진 섭리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진행되는 기계적인 일정은 신화와도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그것은 기계적 우주론을 떠오르게 하지만, 시계 톱니바퀴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부재하다. 이 우주에서는 인간의 체온이나 형벌처럼 가혹하게 정해진 운명에 교감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저 먼 곳에서 비치는 밝은 빛을 희망삼아 다시금 이동하지만 정작 그곳에 도달하면, 반대의 저 곳에서 또다시 이리로 오라고 유혹한다. 이러한 이동은 철새가 지구의 자기장의 방향에 반응하여 길을 떠나는 듯한 자동성을 가진다. 그러나 철새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맹목인가, 아니면 순리대로 가는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영화처럼 조명 받는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은 끝없이 연기될 뿐이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인생의 여정들은 그 목표가 무엇이든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악무한 속에 갇힌 현대적 삶의 방식이 기계장치에 의해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묵뚝뚝하기 그지없는 이 장치들은 슬프거나 고뇌하는 표정도 아파하는 몸짓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 자체로 한없이 무겁고 절망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아니면 자동반복의 와중에도 지치지 않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봐야할까. 사물과 공간으로 하여금 연기하게 하는 김태은의 방식은 이 작품에서도 관철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메카니즘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자동적 메카니즘에는 예기치 못한 무의식이 발견된다.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는 ‘cinematic region’이라는 전시부제에도 담긴, 영화라는 장르에서도 두드러진다. 영화의 초창기부터 그 미학적, 정치적 가능성을 간파한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충동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듯이, 카메라를 통해서 시각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사물을 확대하여 촬영하고 일상적인 사물의 세부를 강조하여 보여주는 카메라 렌즈는 육안과 다르게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사물을 인간에게 보다 가까이 당겨오고, 사물을 그 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고 분위기를 파괴하는데 이것이 현대의 지각작용의 특징이다.
모든 것이 복제되고 유일성과 고유의 분위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현대예술가는 새로운 시공간의 짜임을 추구하게 된다. 김태은의 작품에서 악몽 같은 삶의 회로도를 연상시키는 기제는 기계적 반복에서 오는 효과와 밀접하다. 그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고시원으로 압축되는 주거 공간은 그곳에 흘러들어간 인생들의 삶의 단면을 필름 한 칸 한 칸을 채우듯이 담아낸다. 죽음을 향해서 ‘진보’하는 법칙만이 지배하는 그런 곳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안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것이다. 그의 시나리오를 통해 보여 진 삶의 단면은, 한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증명에 피 흘리는 타인의 희생이 요구되는 어두운 세계이다. 그의 작품 속 무대는 밝고 잘 정돈된 중산층적인 주거지이든, 촘촘하게 칸막이 처진 어둡고 열악한 임시 거처를 연상시키든 간에, 고유의 내면성과 영혼을 가진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계적 필연성을 진행시키고 있을 따름인 장치들만이 드러나 있다. 세트를 연출하여 찍은 사진이나 영상에도 삶 그자체가 아닌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될 수 있을 뿐인 관객이자 작가의 시선만이 떠돈다. 생중계처럼 인간에게 직접 포커스가 맞추어진 경우, 그들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보이는 카메라는 기피대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카메라는 그 존재를 늘 의식해야 하는 찜찜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체에 의해 현대적 지각 방식이 결정되고 있다. 김태은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붓과 어울리는 자연과 인간 대신에, 기계와 어울리는 문명과 사물에 더욱 이끌리고 있는 듯하다. 현대는 부정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인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인간에 대해 타자인 것들을 인간과 동일자로 만드는 근대적 사고’(미셀 푸코)로부터 벗어나려는 현대예술의 흐름과 함께 한다. 그 대표적인 경향은 누보로망이라 이름 붙여진 현대 소설과 영화에서 등장한 조류이다. 그들은 동일자적 사고의 전형적인 방식은 19세기 식의 리얼리즘이라고 지적한다. 누보로망의 작가 미셀 뷔토르에 의하면 전형적인 리얼리즘에서 인간은 사물을 지배하고 모든 것의 이유였던 주인이고, 여기에서 사물은 그저 인간에게 끝없이 인간자신의 모습을 반사해 주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주의에 등장하는 물체들이 마음을 안심시키는 이유는, 이 물체와 물체의 소유자 사이에 일종의 불변의 항등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브그리예에 의하면 현대소설(누보로망)에서는 아무 것에서도 출발하지 않은 묘사가 특징이다. 거기에는 완결된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없다. 굳이 인간이 등장한다면 매우 익명적이다. 페이지들에서 인간의 위치는 묘사된 사물들에 있지 않고 그 묘사의 움직임 자체 속에 있다. 새로운 예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 세계가 이미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상적인 세계의 부재를 보여줄 뿐이다.
누보로망엔 새로운 종류의 화자가 전제된다. 누보로망의 이론에 의하면 새로운 화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사물들을 묘사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창조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창조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새로운 예술에서 작가는 완성된 세계의 묘사자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조직하고 조직되는 관계가 된다. 김태은의 방식은 전형적인 그림처럼 인간과 세계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대신에, 사물을 배치하고 조명하며 새로운 기호의 네트워크를 짜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환상적으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평행한 세계일뿐이다. 이 평행한 세계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의 세계와 매우 닮아있다. 작가는 인간 대신에 침묵하는 사물들이 두께를 탐사함으로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회귀하고자 한다. 누보로망의 방식과 비교될 수 있는 현대미술의 사조는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누보로망과 마찬가지로 예술 대신에 사물에 눈을 돌린다. 김태은의 작품 역시 최소한의 표현형식, 텅 빈 풍경, 연극성을 야기하는 장면,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는 작품의 지각방식으로 인해 미니멀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누보로망의 작가들이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씌여진다’고 선언하던 시대에 미니멀리즘이 만들어진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본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당시 미니멀리스트의 목적은 조각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원천을 외부에 설정하는 것이었다. 즉 더 이상 심리적 공간의 사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사물의 표면 위에 띄워 놓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에서 나타나는 세계는 ‘의미도 없고 영혼도 없으며 반들거리는 표면’(로브그리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표면에 대해 인간은 아무런 실권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이다. 사물의 표면을 움직이는 또 다른 시선은 이성의 동일성을 비켜 가는 타자의 언어들, 즉 침묵이다. 오늘날 침묵은 불분명한 메시지나 소음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연성과 해체로 특징 지워지는 침묵은 인간적인 말과 몸짓 못지않게 무엇인가를 말한다. MTV나 영화를 비롯한 현대적인 지각방식에 익숙한 대중들은 이러한 침묵의 언어를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습득하며 해독하고 있다. 침묵의 언어는 오늘날 상품의 세계부터 예술의 세계까지 널리 통용 되고 있다. 그림을 떠나 새로운 매체계 속에서 작업하는 김태은에게 이러한 침묵의 언어들은 비인간적인 예술이 아니라, 이미 시효가 만료된 기존의 협소한 인간과 언어개념을 확장하는 또 다른 소통 방식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