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 & 류병학 인터뷰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미디어 아트
코요테 뮤직비디오 <실연>(1999) 감독, 아트센터 나비
류병학(앞으로 ‘류’로 표기함) 김 선생님은 홍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연대에서 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을 밟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선생님은 뮤직비디오 미디어 아트 CF 영화 연극 무용 패션 등 예술계 전반에서 활동하고 있더군요. 우선 뮤직비디오 감독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태은(앞으로 ‘김’으로 표기함) 저는 1995년 덕원 갤러리에서 열린 집단정신展에서 스토리텔링 구조의 이야기를 흑백 사진으로 촬영한 작품 <여행자의 이야기(traveler's tale)>를 전시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뮤직비디오 제작자를 만나 당시 개국한 Mnet케이블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뮤직비디오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 인연으로 뮤직비디오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 후 1999년 코요테 <실연> 뮤직비디오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류 김 선생님은 CF 감독도 했지요.
김 슈가큐브 웹 광고 프로덕션에서 제의가 와서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저에게 있어 CF감독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터라 뮤직비디오나 영화감독들이 가끔 본업을 쉴 때 하는 정도라 보면 됩니다. 삼성 ID10100 인터넷 광고가 CF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TV광고와는 달리 영화적 관점에서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옵니버스 광고라 할 수 있습니다.
류 뮤직비디오와 CF 감독을 거쳐 2005년 영화 <애인>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연출부 활동을 거쳐 영화감독이 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시나리오를 직접 쓸 경우 영화감독으로 등단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런데 김 선생님은 그 두 경우와 달리 ‘투자’를 피할 수 없는 상업영화 감독을 하셨습니다. 혹 김 선생님께서 단편영화
김 그건 별개 것입니다. 영화사와 원래 찍기로 한 시나리오가 있어서 그걸 1년 정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미 촬영하고 있던 <애인>에 대한 제안이 들어와서 하게 된 것입니다.
류 자, 그럼 이제 김 선생님의 미술계 활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 선생님의 첫 개인전은 서남미술관에서 열린 <시각적 봉입장치>(2000년)입니다. <시각적 봉입장치>는 12 DC와 모터, 라이트, 필름, 조광 스위치(dimmer switch) 등으로 제작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김 선생님의 <시각적 봉입장치>를 “단순한 매직랜턴 장치를 기호의 디스플레이로 사용했던 작업”으로 보았는데, 그 작업에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김 ‘시각, 본다는 것, 착시 - 이미지의 오류’가 그 전시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4면이 다른 기호들이 독립된 것으로 보이지만 돌아가는 속도의 정도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 보이는 장치를 고안해 내게 된 것입니다. 4개의 모양은 합쳐져서 하나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빛은 관객의 눈에 연속적이기도 하고 불연속 적이기도 합니다. 이건 영화메커니즘의 플리커 현상에서부터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독립된 이미지가 회전하면서 서로 섞이게 되어 착시를 일으키는 것에서 저는 작품을 전시하면서 관객에게 ‘지금 보는 것은 무엇 같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럼 처음에 ‘무엇이었는데, 돌리고 나니 무엇처럼 보입니다’라고 답하겠지요. 근데 그 무엇처럼 보인다는 것은 모두 말하는 사람마다 달라서 흥미로웠습니다.
매직랜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근데 전 한번도 매직랜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일정한 회전속도에 따라 보이는 환영(Illusion)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고, 관객이 직접 손으로 돌려서 볼 수 있는 작품과 관객간의 물리적 거리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 작품은 관객이 직접 손으로 회전 스위치를 돌려서 그 모양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회전 정도에 따라 변화되는 모양과 패턴들의 데이터를 그림으로 기록하여 놓은 데이터가 있었는데 작업실 이사과정에서 유실되었습니다.
류 ‘시각, 본다는 것, 착시 - 이미지의 오류’는 김 선생님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의 두 번째 개인전인 창 갤러리에서 열린 <포이즌(Poison)>(2003년)은 영상작품을 전시할 바로 창 갤러리 전시장을 촬영한 영상을 전시장 벽면에 투사한 작품입니다. 따라서 관객은 ‘착각(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단순히 이미지의 오류에 만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 김 선생님은 벽 넘어 저편, 즉 비가시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요?
김 벽 너머 저편은 일단 제가 무척 궁금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공간입니다. 이미지의 오류는 그것을 보는 주체에 해당하는 것이고(시각주체) 그 주체가 바라보는 방향 어딘가에 평행으로 막혀있는 막(스크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화를 공부하면서 알베르티가 그린 시각피라미드를 보고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아마 그 이론이 저에게 잠재되어 있던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시각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제 방에 무척 높은 곳에 창문 하나가 있었는데 그 창문을 보려면 의자 몇 개와 책들을 놓아야 했지요. 창문 너머에 누가 지나가는지, 어떤 소리가 나면 궁금해 했고 그걸 보기 위해 방안에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했었지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해결되겠지만 그건 재미 없었고 갇혀있는 걸 유희적인 측면으로 중요시 여겼던 것 같아요.
류 바로 그 점이 잘 드러난 작품이 중앙미술대전 대상작이었던 <시소>(2005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은 놀이기구 시소를 이용하여 시소 가운데 마치 유리창과 같은 스크린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두 명의 관객이 시소의 서로 다른 위치에 마주앉아 놀이할 경우 낮은 위치에 있는 관객은 담을 보게 되고, 높은 곳에 위치하는 관객은 담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김 선생님의 <시소>는 관객에게 담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관객의 호기심은 다름아닌 관객 자신의 시소놀이를 통해 전혀 상상치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됨으로서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저는 <시소>를 보면서 이런 의문점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작가는 시점이동 촬영을 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시소>가 제작되었던 2005년도 알고 보니 김 선생님은 (단편과 장편)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해이더군요. 따라서 <시소>의 시점이동 촬영은 영화에서 크레인을 이용하여 카메라로 촬영되는 방식에서 고안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김 창문(window)의 역할은 우리에게 막힌 벽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죠. ‘시소’의 선택은 당시 맥도날드 광고에서 착안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프레임이 중요하듯 시선의 이동 또한 그 프레임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시소> 작품에서 창문을 막고 있는 담은 시선의 이동을 하게 만드는 동기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담을 넘는 도구로 시소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릴 적 제 방에 있던 70년대 창문과 비슷한 걸 찾으려고 서울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녔던 것이 기억나네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묘하게도 기술적인 측면 이면에 정치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관객을 유도한다는 측면이 그러한데, 관객에게 동기유발을 시키는 매체가 강압적인지, 친절한지가 바로 그것이지요. 매우 파쇼적으로 관객에게 참여를 강요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관객이 참여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자율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빌미로 관객에게 강요하는 스타일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의 기술적 측면에 정치적 요소가 있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소> 작품이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작품이라면, 선생님의
<사이클 드로잉>은 옆으로 나란히 설치된 두 개의 턴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기존 턴테이블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턴테이블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턴테이블입니다. 기존 턴테이블 위에는 기존 LP판이 있고, 다른 턴테이블 위에는 백색의 LP판이 있습니다. 그 두 대의 턴테이블 사이에 핸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김 선생님은 기존 턴테이블 위에 있는 LP판이 돌고 있지만 음악을 흘러나오지 않도록 (바늘을 움직이지 않고) LP판만 돌도록 조작해 놓았습니다. 반면 관객이 두 턴테이블 사이에 설치된 핸들을 돌리면 선생님께서 제작한 턴테이블 위의 백색의 LP판이 돌면서 바늘로 드로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관객이 말했듯이) 관객이 “‘듣게’ 되는 것은 LP판의 보일 듯 말 듯한 홈(glove)에 내장된 음악이 아니라, 핸들과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기계소음”입니다. 따라서 관객이 핸들을 돌리면 돌릴수록 그려지는 원의 숫자만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사이클 드로잉>은 음악을 그리는, 즉 청각적 음악이 아니라 시각적 음악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음악이라고 말입니다.
김 LP판은 물질적인 오디오 비쥬얼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정 LP판 안에 소리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은 디지털 오디오 파일과 달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작업이 Double Exposure라는 큰 컨셉 안에 제작된 여러 작품 들 중에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상대적인 두 가지 간의 관계를 탐구하다가 레코드 판을 그대로 그려본다는 것을 착안해 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코드판을 하나의 이미지로 해석한 거죠.
지름을 계산하고, 회전수에 맞는 홈을 파고 핸들을 달고 기어들을 고안해서 핸들을 돌리면 원래 LP판과 똑 같은 지름의 그림이 그려지도록 하였습니다. 단지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만든 것이었는데 관객의 행동은 매우 재미나게도 그림을 그리면서 왼쪽 LP판 위에 자꾸 바늘(카트리지)를 올려놓고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엠프도 없고 스피커도 없는데 소리가 날 줄 알았는지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LP판과 바늘이 한 세트로써 소리를 내는 장치로써 매우 일반적인 비쥬얼 리터리시였던 것이었다고 봅니다. 결국 그림은 소리가 없지만 그리는 동안에 소리가 나는 것을 상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는 음악이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류 김 선생님은 2007년 청담동 트리아드 갤러리에서 3번째 개인전인
김 네. 하루종일 일주일, 일년 등 건물은 늘 제자리인데 바람과 태양열, 비둘기의 배설, 사람의 손때 등 변화요소들이 늘 작용한다는 것과 그 작용이 변화시키는 결과들의 추이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실제 건물 외벽에 거대한 프로펠러를 장착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건물주가 동의를 하지 않는 바람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비시각적이란 것은 디지털 기호, 데이터와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완전히 비시각적인 0(Zero)보다는 1에 가까운 중간에 해당되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류 김 선생님은 2008년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라는 타이틀로 가나아트센터 포럼 스페이스에서 4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조류충돌은 문자 그대로 조류가 비행기 유리창에 부딪혀 항공기 동체가 찌그러지거나, 새가 엔진 속에 빨려 들어가면 부품이 파손되어 항공사고를 일으키는 현상을 뜻합니다. 심할 경우 유리창이 깨지거나 폭발이 일어나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은 그와 같은 조류충돌을 전시 타이틀로 명명했습니다.
당시 전시되었던 작품들 중 <잘못된 행성(wrong planet)>은 전시장 기둥과 벽면 모서리를 이용해 육각형 거울들을 설치하여 서로 반대방향에서 똑같은 영상들을 흐르게 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영상들은 소실점에서 만자지 않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관객에게 보여집니다. 아니, 관객은 거울에 비친 상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이미지를 3가지 시선, 즉 거울에 비춰진 상과 거을에서 반사된 상 그리고 반사된 상이 다시 거울에 보이게 되는 상을 충돌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가지 시선이 충돌하여 관객의 눈에 포착되는 해체된 영상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알 수 없는 이미지입니다.
김
그 후
물론 작품의 원본은 컴퓨터가 랜덤하게 구멍을 뚫어 영상너머의 공간과 영상의 공간이 서로 섞여서 모호하게 병치를 시키는 것이지만 최종 결과물은 거울조각들이 반사시키는 것입니다. 기둥 모서리 면을 활용하여 세 시점을 하나의 위치에서 만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초기의 회화들에서 보여지는 미래주의, 입체주의자들의 화면에서 의도한 시점과 시간의 충돌방식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류 김 선생님의 <잘못된 행성>은 행성의 어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행성(planet)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떠돌이, 방랑자라는 planetai에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방랑자라는 의미는 <<버드 스트라이크>>의 또 다른 작품인 <이젤 페인팅(easel painting)>에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이젤 페인팅>은 조작된 이젤과 웹카메라를 이용한 컴퓨터 작업, 즉 기계가 그림(영상)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우선 이젤 경우 이젤의 수평구조, 즉 캔버스를 올려놓는 받침대나 캔버스를 받치는 등받이 등을 거울로 제작하여 수직구조틀에 모터를 설치하여 수평구조틀을 움직이게 하여 주위를 스케닝 합니다. 그리고 웹카메라 경우 움직이는 관객을 포착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전송되어 부호화시켜 이젤 옆에 위치한 캔버스(스크린)에 그려놓습니다. 따라서 컴퓨터는 일종의 화가의 파렛트가 되는 셈이죠.
김 선생님의 <이젤 페인팅>은 화가와 이젤이 충돌하고, 관객과 모델이 충돌하게 됩니다. 화가와 이젤의 충돌은 화가의 부재로 이젤이 화가의 시선으로 자리바꿈됩니다. 그리고 관객과 모델의 충돌은 흥미롭게도 관객을 관객이면서 동시에 그림의 모델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갖도록 합니다. 따라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젤이 그림을 그립니다. 이젤이 그리는 모델은 다름아닌 관객과 주변입니다.
김 도식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정리를 해 주시는군요. 이젤 페인팅은 화가의 부재를 그 시작점으로 잡았습니다. 이젤페인팅에서 수평구조틀은 초기 이 작품이 구상된 고양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 스튜디오 전시장에 수평으로 만들어진 에어콘 가림막이 있었는데 그 틀이 수평구조틀로 되었고 모두 그 틀을 피해 전시를 하고 있더군요. 전 오히려 그 틀을 이용하고자 했고, double exposure의 컨셉으로 제작된 circle drawing 작품처럼 그 구조틀을 보고 르네상스 시대의 그리드 장치를 이용해 풍경화를 모사하는 화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화가와 캔바스를 떼어내면 그 어떤 구조체가 필요하게 되는데 전 그 구조체에 키네틱한 장치를 고안하게 된 것이지요.
그 후로 한 차례 업그레이드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젤페인팅에서의 기계적 부품들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입니다. 수평틀에 반사시키는 거울로 재질을 바꾼 것은 지속적으로 각도를 움직여 반사시키는 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화가의 시점이 대상 주변을 돌아다니는 유동성과 일치하게끔 하려 한 시도에서였습니다. 어떤 관객은 카메라 앞에 자신의 손을 대고 손이 잘려나가면서 다르게 붙여지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더군요. 전 큐브 영화에서 나오 듯 잘려나간 신체에 섬뜩하던데, 지금 관객들은 워낙 매체가 가짜로 리얼함에 익숙하다보니 초기 영화시대에서 프레임 밖에 잘려나간 신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몇 차원 다른 감각을 가진 듯합니다.
류 김 선생님은 2008년부터 영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배우와 관객, 미술과 영화의 충돌을 다루는 작품에 주목한 것 같습니다. 김 선생님의
김 영화조명과 세트가 만들어낸 분할된 공간은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작품을 생각해 보니 제가 입시준비할 때 저녁에 압구정동에서 벌어진 가수 현진영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을 잊을 수 없군요. 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열악한 환경에서 촬영했는지 지나가는 행인들도 통제 안하고 조명만 켜 놓고 찍고 있었는데 그 옆을 제가 지나가면서 제 머리위에 현진영과 동일한 조명이 따뜻하게 내리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이상한 현실과의 모호한 경계를 느꼈습니다.
제가 연출부 시절에도 조명이 켜진 곳에 다른 행인들이 못 들어오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많이 했던 터라 지금도 배우와 스텝이 없더라도 고정된 조명이 아닌 촬영용 조명만 봐도 이게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심지어는 학생들 작품인지 그 사이즈와 종류를 보고 판단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관객들 또한 촬영장면에 이제 익숙해진 듯합니다. 물론 배우의 비중에 따라 관객의 반응은 다르겠지만 길거리에서 조명을 켜 놓고 촬영하는 장면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처럼 평범한 현상입니다.
이젤 페인팅에서 화가를 떼어냈듯이 라이트와 카메라가 설치된 촬영현장에서 배우를 떼어 내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분할된 현실의 또 다른 공간이 생기더군요. 관객들은 이미 저 너머의 공간을 지배하던 지배자였는데 라이트로 분리된 빈 공간에서는 더 이상 주체적인 지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지시(direction)를 기다리는 피지배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류 촬영 장소 밖에 위치한 관객은 촬영 장소 밖의 지배자이지만, 촬영 장소 안에서의 관객은 마치 감독의 지시를 기다리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피지배자란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관객 때문에 장소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소의 성격에 따라 관객은 룰 모델을 달리하는 셈이군요. 그 점은 미술과 영화의 충돌을 확장시킨 작품들을 전시했던 김 선생님의 5번째 개인전인 <
김 선생님의
김 오히려 실제 상황은 영화를 넘어서는 경향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작품을 하면서 얻은 수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 시네큐브 밑에 놓여진 2인용 쇼파의 길이에서 촬영한 장면과 실제 관람객을 찍은 장면에서는 일반인들의 행동유형이 더 많은 가지 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입까지 맞추는 돌발행동도 하더군요. 화장실 복도 또한 실제 물리적 공간이 만들어낸 인물들의 동선에 철저히 일반관객들도 그것을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평소의 모습이었는데 제 머리 속에는 영화 속 모습이 더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유희성을 방송에서는 먼저 알았던 걸까요?
몰카 테마가 유행이었던 적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영화는 연출되고 계획된 것이지만 일반상황은 그야말로 랜덤이 아닐까요? 이 작품은 제가 연출한 단편영화를 가지고 한 것이지만 이미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을 가지고 영화 속에 촬영된 장소에 가서 그 장면들을 똑같이 재연한 영상작품도 있더군요.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바뀌었지만 영화 속 공간은 또 다른 스크린처럼 현실에 여기저기 편제하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 삼성동 코엑스 광장을 자주 가게 되는데 1998년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쉬리 촬영현장이 떠오르면서 현실 속 사람들과 영화 장면과 자주 오버랩이 되는 걸 느낍니다. 당시 스텝으로 잠깐 참여했었거든요. 이 작업은 요즘 제가 영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미디어 아티스트로써 아주 편하고 흥미롭게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력의 범위 또한 넓어지고 있어서 당분간 이 작업에 몰입할 거 같습니다.
류 그동안 김 선생님의 작품들에 대해 국내 미술계 평자들은 몇 가지 문제점들을 언급했습니다. 우선 김 선생님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서사가 단속적이라는 점, 즉 작품과 작품 사이의 네트워크가 부재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멜 인터뷰를 통해 살펴본 김 선생님의 작품들은 문맥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김 선생님의 작품들을 “일화적(episodic) 소모구조”로 간주될 수 없다고 봅니다.
김 몇 가지 지적과 문제점 그 이면에는 기술의 사용이라는 측면과 이미지의 전달이나 묘사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기술이 전면에 나서면 서사가 어렵고 서사가 나서면 기술이 배제되는 둘 간의 작용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이미지 생산의 도구로써 사용된 기술이 회화처럼 일정하지 않고 나무, 철, 모터, 센서, 컴퓨터(computing), 레코드판, 이젤 등 다양한 매체들이 표면에 나서다 보니 읽혀지는 패턴 또한 일시적이면서 즉각적으로 보려 하면 각기 다른 독립된 개체로 보이기 쉽게 됩니다. 따라서 한 작가의 작품의 통일성에 비해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형태들과 그 형태들 간 유사성 사이의 간극이 멀어지면서 나온 지적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의 생산패턴과 주기는 작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작가가 어떠한 시스템으로 이 생태계를 살아가는지 탐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영역에서 활동하다보니 그 패턴 주기가 매우 긴 편인 듯합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예전에 했던 작업이나 경험했던 순간들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기를 반복하게 되면서 매 순간마다 늘 여러 가지 역할로 분한 나 자신이 서로 연락을 하면서 지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늘 그런 현상을 대비해 메모를 합니다. 그 메모들의 내용을 보면 인과관계가 결여된 무작위이고 즉흥적입니다. 쓰여지다 만 1페이지는 갑자기 10페이지에 가서 완성이 되는 구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류 혹자는 김 선생님의 작품 개념들이 예시적이라는 점, 즉 “기술적 동원에 비해 작품의 저항이 약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제가 김 선생님과 이멜 인터뷰를 통해 단편적으로 살펴본 작품들은 ‘비가시적인 것’을 꾸준히 드러내기 위해 기술을 동원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김 선생님의 작품이 일종의 ‘데모’로 간주될 수 있다는 어느 분의 걱정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김 대통령도 임기 중에 중간평가라는 게 있듯 저에게도 지금 쯤 중간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1998년 회화에서부터 시작해서 매체별 wrong planet 시리즈, 또 지금의 영화광선 작업까지 정리하는 전시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변화는 제 신체가 공연영상, 뮤직비디오감독, 영화감독, 미디어 작가 등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익숙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질적이지 않고 믹서기 안에서 조합시키는 신체적 반응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 것들, 과거 사건들로 돌아가기 바쁘고 그 위치에서 현재를 넘어 투영된 먼 미래적 상상을 하기를 즐겨 합니다.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라는 표현에서 영상기술문화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환영을 만들어내던 스크린이 2.5D와 3D를 거쳐 4D로 나가는 현상이 그러한데 우린 늘 보이지 않는 것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그러하지 못해서 늘 기술을 만들어 내고 기술에 의존하지요. 벤야민의 기술변증법은 한 시대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여러 시대를 넘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술은 앞으로 신체위에 얹혀지는 물질이 아닌 신체와 동일시되거나 신체 속에 이식되는 방식으로 진화될 조짐이 보입니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써 저 자신은 언제든 이 기술들이 과거 원시시대의 그 어느 방법과 관통하는 맥을 가지고 있는지 탐구하고 싶습니다.
류 김 선생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미디어 아트와 영화 사이의 차이로 인터랙티브를 들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보았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대부분 예정된 인터랙티브였습니다. 이를테면 결과를 전제로 한 인터랙티브 아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아트는 결과를 관객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알 수 없을 때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여와 공유 그리고 개방이라는 쇼설네트워킹 시대의 관객은 인터랙티브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미디어 아트는 결과 중심의 미디어 아트가 아닌 과정의 미디어 아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당시엔 너무 교과서적인 안일한 이야기를 했군요. 아마 그 때는 스마트 폰이 없어서였을 겁니다.(웃음) 앞으로 이 시대가 before 스마트폰과 after 스마트 폰으로 나뉘어진다는 우스게 소리는 불과 몇 년 전 상황과 지금의 차이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인터랙티브가 정해진 결과를 전제로 한 것이듯, 컴퓨터에서 랜덤이라는 것도 무제한이 아닌 제한적이며 그 경우의 수가 인간이 기억하는 범위보다 조금 더 넓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 뿐 입니다. 그 어떤 경우의 수도 무제한 적으로 결과 값을 생성되려면 끊임없는 입력(input)과 계산과정(process), 그리고 다른 형태의 출력(output)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사람이 유전자 체계에서 볼 수 있는데 지문이나 얼굴이 똑 같은 사람이 안 나오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내는 재생산품들은 제한적이어서 애당초 자연물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마치 이카루스의 꿈과도 같지 않을까요? 최근 미디어 아트에서 인공생명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관객도 작가도 예상치 못한 결과 값이 나온다는 것에 대한 키워드는 지문이 모두 다른 인간생태계 안에 그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해 봅니다.
소셜 네트워킹의 구조도가 얼마만큼 진화되고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생성할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 아트가 기술, 프로그램 기반의 결과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변수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존과 다른 무언가가 나올 것으로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디어 아트 생산구조에 기존과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어져야 합니다. 한 예로써 요즘 흔히들 말하고 있는 통섭, 융합의 이론들은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열린 결말로 내어 놓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이러한 요구에 걸맞는 작업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디어 아트의 인터랙티비티가 무한대의 값을 낼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 성공적일지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메커니즘에 한계를 본다면 섣불리 절망적이진 않습니다. 어찌보면 자연도 일정한 순환 고리가 있고 우주도 그렇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단속적이고 커다란 자연의 순환 고리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대자연의 원리를 살아가는 동안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터랙티비티가 진정한 랜덤으로 가려는 시도는 매우 발전적이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안개 속 ‘thing‘과 같다고 봅니다.
류 우리는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일을 알 수 있다면 삶의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김 선생님의 내일 작품을 알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김 선생님의 내일 작품을 기대해 봅니다. 늦은 시간까지 저의 이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