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어법으로 미술 영역을 넘어가다
이 섭│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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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이제 어떤 형식으로 더욱 미술다울지 고민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조짐은 일찌감치 작가들이 벌려놓은 형식 파괴의 다양한 실험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변화의 양상이 조짐을 넘어서 하나의 일괄적인 양식실험을 보이고 있으며, 한 발 더 나간 작가들은 형식을 넘어 완전하게 미술적 문법 밖에서 미술을 재론하려 한다. 영상매체를 형식으로 수용한 작가들 사이에서 이 문제는 보다 내밀한 미술어법과 익숙한 영화어법으로 뒤섞여져 미술을 더 이상 미술로 명명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영상미술의 영역조차도 미술이라는 접미어의 기반이 약해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화이트큐브(미술관-화랑)에서 만나는 영화문법을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미술이라 부른다.
김태은은 영화에 더욱 치중하는 작가다. 그렇다고 영화작가로만 분류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줄기차게 미술 안에서 자신의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미술로 명명되는 표현장치로 영화적 어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미술형식 안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구사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분명 미술과 영화 그 사이에 있다. 사이에‘있다’기 보다 영화에 관여하고 미술에 관여한다는 지적이 옳다. 그런데 미술로 보기에는 왠지 낯설고 미술어법을 가지고 읽기가 곤란한 작업들이 그의 손을 통해 만들어 진다. 분명 외형은 미술-설치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영상으로 흐르는 그만의 서사로 꽉 차있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 치중하는 작가로 보여도 무방하다.
김태은의 작업에서 최근에 주목해야 할 작품이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케한〈시소〉작업이다. 놀이기구로서 시소는 무게 중심의 이동으로 인해 높낮이가 변하면서 풍광이 변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지닌 매우 과학적인 놀이방식을 제안한다. 아이들이 이 시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닐곱 살 만 되어도 이 기구를 싫어하지만, 단순한 방식으로 제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바뀌는데 이게 반복적이면서 지속적이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이 단순한 반복 효과 때문에 금방 싫증을 내기도 하지만, 하여간 이 놀이기구의 생명력은 그래서 미끄럼틀만큼이나 애호의 길이가 길다.이 기구의 장치적 효과를 그대로 이용하여 보이는 세계의 지속적인 변화를 영상에 담아 낸 작품이 최근 그에게‘대상’이라는 형식으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일정한 높이에 이르러야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로 잡아내 인공적인 기울기에서 관람객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의사체험이 실재하는 기이한 풍경을 전시장에서 연출하였다. 이 작품은 분명 실사를 재현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가짜’가 되어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바뀌는데 묘미가 있다. 이 기본적인 입장이 재현에 대한 재현을 끝없이 가공하고 있는 미술을 넘어, 영화적 어법인 의사체험
의 시공간으로 관람객을 데리고 간다. 일반적인 영상미술의 영상 내용은 이와 반대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적절하게 구사하면서‘가짜’임이 분명한 재현된 상황(사물)을 재현 안에서 묶어버림으로써 서사를 잘라내는데 반해, 김태은은 철저하게 영화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 점은 아마도 그가 영화에 매료되어 실제 영화작업을 병행하기 때문에 쉽게 영상어법에 적응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영상작가들과 구분되고 개성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최근에 작가들의 이미지 작업들을 보면서 그것이 영화가 되었든 영상작업이든 전통적인 미술작업방식이든 내용과 형식을 가름하고 덧붙여‘서사’에 주목한다. 서사가 없다느니 서사가 약하다느니 아니면 서사가 빠졌다는 둥 댓글 달듯이‘서사’또는‘내러티브’운운하기를 곧 잘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이 서사의 정체가 무엇이 길래 느닷없이 서사 운운하는 지경에 우리 미술이 와 있을까?
서사는 바로‘겪은 일’을 의미한다. 작가가,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서사를 운운한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약하다거나.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확실히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생산되는 이미지들은 제 겪은 일을 일체 풀어놓지 않는 쪽에 기울어져 있다. 마치 광고 이미지처럼 말이다. 마치 넋 빠져 있는 맹랑한 SF물처럼 말이다. 서사가 없으면 잔재미도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드라마조차‘겪은 일’이 아닌 풍문에 들어 본 바 있는‘일’들로 만들어지는 지경이라 더욱 서사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미술작품 안에 영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 다발로 제 역할 하는 영상물이 절연된 이미지로 맞물려 있다 보니 우리는 작가들에게 서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어법에서는 서사가 생략될 수 없는 노릇이며 약하게 드러날 수 있겠지만, 미술 같은 단면적 이미지에서는 애시당초 서사가 중요하게 역할하지 않아도 좋았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미지를 다발로 묶어내는 통에 더 이상 기다리거나 유예하지 못하고‘서사’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김태은은 다른 영상작가들과 확연한 구분점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그는 아무리 짧은 영상작업일지라도 무의미하게 대상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 기승전결은 없다 해도 그의 영상작업들은 일정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어 차분하게, 영화 보듯이, 다 볼 수 있다면 작가의‘구라’를 읽어내게 된다. 아니다. 김태은은‘구라’를 늘어놓지 않는다. 마치 제 할 일 똑딱거리며 해내는 조용하고 반듯한 아이처럼 진지하게, 명료하게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갖는 기대치보다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지 않는지도 모른다.그의 작업은 미술 내부에서 끝없이 거론되는 재현-재현의 재현을 구사한다. 그의 작업에서 영화적 어법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구사되어 이해를 구하는 관람객에게 친절하기까지 하다. 이 두 가지 매체 속성이 절합되어 있는 것이 바로 김태은의 작업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관심, 제1세계(눈에 보이는 세계 모두)를 맹렬하게 재현해 낸다. 그 장인적 태도 안에는 그가 재현한 제1세계 안에 놓인 제2세계(제1세계로부터 구하는 의미, 상징, 가치들), 즉 담지 된 의미를 확연하게 하고픈 작가적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아마도 그는 이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영화와 조우를 기쁘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매력은 의미를 담아내는 가장 큰, 현대 예술이 찾아낸 가장 큰 그릇이라는 점이다. 이 그릇 안에 담아낼 의미 항들은 때로 중의적으로 제 몸이 섞여있기도 하고 때로 서투른 솜씨의 견습생의 고단한 몸뚱아리로 작난아닌 작난이 되어버린 의미의 날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이 작가는 그 서사의 진정함으로 양극처럼 보이는 이 지경들을 오가면서도 제 겪은 일에 대해 차분하게 말함으로써 나대거나 겉돌지 않는 미덕을 작품 안에 오롯이 남길 줄 안다. 의미들 지닌 형식의 미술적 재현성은 놀라울 만큼 정교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조각과 같다. 그러나 재현된 형태 안에 영상이 담아내는 솔직한 제 목소리들은 재현을 통해 만들어진(만들어지고 있는) 형상의 반복을 훌쩍 넘어서 영화처럼 일정 시간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상물이 지닌 제 목소리는 그런
의사체험을 진지하게 반복시키고 있다. 그는 미술적 형식과 영화적 어법을 살가운 관계처럼 섞어 놓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적 의미전달의 극치〈사각형 구조〉
〈사각형 구조〉라는 작품은 여타 작업에 비해 보다 현학적 방식을 노골적으로 취한다. 우선 작품 이전의 설정이 그러하다. 사각형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형태가지닌 추상적 의미들을 그대로 차입한다. 그런데 누구라도 알고 있듯이 일반적인책상이 이 형태를 유지한다. 그것도 한 뼘 가공 없이 그대로 가져온다. 그리곤 천연덕스럽게 그 사각형을 관계의 사이 공간이라 부른다. 그렇게 배치함으로써, 배치가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제 겪었던 일을 조각난 이미지들로 채워 보여준다. 팔꿈치를 서로 맞대고 있는 형상, 커피 잔(또는 찻잔)이 영화어법처럼 마주하고 있어 누가보아도 이 상황이 최소 하나의 관계 안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이미지 왜곡을 수선한다.
이 작품의 잔재미는, 잔재미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김태은에게 있어 재현을 완곡하게 완성시키려는 의도인데, 설정된 공간과 존재하고 있는 그 공간의 사이에 떨어지는 무수한 이형적 모듈 이미지들이다. 왜 꽃이 아니고 상징적 기호도 사용하지 않고 정사각형, 직사각형 따위의 추상적 이미지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줄까? 앞서 설정된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면, 재현의 재현은 그렇게 시작하는 법인데, 그렇다면 당연히‘사이’는 없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보면 공간의 비실재성 때문에‘사이’를 얼마나 지루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도 험난한 대서사의 공간들은 부연 설명이 붙음으로써 실재하게 된다). 김태은은 동물적 감각으로, 아니 예술가적 오감으로 이 공간의 부재함을 살려내는방식을알고있는듯하다.‘ 사이’의비실재성때문에고민하여공간의존재성을 만들고는 작가도 그만 이 관계의 재현(재현의 재현)이 얼마나 무모하고 억지인가를 다시 보여주려 한다. 그 선택은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사각형 모듈 이미지다. 아무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거나 관심을 기울여도 읽혀지지 않을 유일한 이미지로 그걸 선택한다. 나머지는 작가의 기술적 서비스다. 움직임, 빛과 음영의 현란함, 빛의 나오고 들어가는 공간적 확장 등은 그렇게 볼 만 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이미지 생산자의 서비스 품목이다. 시소보다 차가운 이 작품은 김태은의 면면에 대한 기대를 조금 더 크게 부풀리게 만든다. 마치 제3세계(제1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발견되는 실재하는 세계들: 현미경으로 보는 마이크로 세계, 초고속사진기로 보게 되는시간의 굴절 등)인 냥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서너 개의 층위로 쌓아 보여준다. 이런 접근 방식은 미술적인 전통적 표현이면서(마치 중세 아이콘회화처럼) 가장 영화적인 의미전달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작품에서도 영화어법을 구사하는 이유를 밝힌 바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상작업들이 가지는‘서사의 부재’가 가져오는 소통의 단절을 경험한 바 있는 감상자들이라면 그의 영화어법은 오히려 이 부분을 상쇄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아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술은 늘 서사에 기대어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많은 사람들은 미술을 그렇게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지도 않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작가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시간을 다 써가며 작품을 보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당연히 소통의 부재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작가가 풀어내야 할 과제로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김태은은 영화어법으로 설명하려는 의도 이외에 미술이 가지는 어법의 새로운 해석을 좀 더 자신의
작품에 투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방식 중에 의의 층위를 포개어 놓은 방식은 그런 기대를 한껏
가지게 만든다. 대체로 소통을 대전제했던 회화적 전통 안에서 수많은 그 당대의 기호와 상징들은 이를 헤집고 풀어내는‘숨겨진 서사’였다. 이 쓰임에는 반드시 다양한 층위를 통해 감상의 자유로운 유영을 허용한다. 시소의 풍광이 풍경을 담았으나 결과적으로 풍광이 되는 것처럼, 사각형 구조가 언뜻 지루한 무언의 서사구조 안에 있는 듯하지만 재현의 재현을 넘어서려는 의도적 도발로 읽혀지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보다 친절한 그러나 얼개가 복잡한 우리 사회의 당대적 기호와 상징들이 더 많이 들어가도 좋겠다. 그렇다면 굳이 영화어법만을 통해 소통이가능한 지점을 옮길 수도 있겠거니와 미술어법이 영화형식에서 녹아나 애니메이션화 되는 재현의 상황도 넓혀지게 될 것이다. 김태은의 작업에서 영화가 되었던지(그는 지금 장편 입봉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미술이 되었던지 두 개의 형식과 어법은 교차 구사될 것이다. 이 도플갱어의 초감각이 하나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영역을 넓혀 사용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아직까지 김태은은 미술에서는 적어도 엉키지 않은 채 잘 걸어왔다. 이제 넘어가려 한다. 넘어가기란 초월의 다름 아니다. 김태은은 초월을 통해 무엇을 꿈꾸는가? 언덕을 넘어 뻔하지만 다른 세상을 보게 된 자만이 또 다른언덕을 넘을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