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티스트 김태은의 기계와 내러티브
이원곤(단국대/미디어예술론)
김태은씨는 회화를 전공하고 영상예술가로서 뮤직비디오, 영화, 광고 등의 분야에서 활약한 바 있다. 이 방면에서의 작업은 어떤 ‘내러티브’를 위해 영상의 프레임 안에서의 미장센과 편집이 위주가 된다. 그러나 그가 미디어아티스트가 되면서 그 활동내용은 달라졌다. 미디어아트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화와 달리 프레임내부, 즉 가상공간에서의 사건을 현실공간에서의 사건과 연결시키거나, 기계장치에 의해 분해, 번역, 전환, 재통합 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관계를 연출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에는 영화와 미디어아트의 구분이 무색한 일련의 용어들이 있다. ‘싱글채널비디오’, ‘마이크로무비’, ‘포켓필름’ ... 사실 그것들이 이전의 ‘실험영화’나 ‘독립영화‘가 지향했던 바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필자는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어떤 때는 이런 구분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미디어아트‘ 전시에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치방식이 되면 영화적 내러티브는 그 한계를 드러낸다. 그 영상들은 단지 프레임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 외부와 관계를 맺고 여기에 관객의 참여도 허락되기 때문이다.
영상의 역사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발명(1895)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그때는 (비록 대부분이 대중적 오락이나 흥행물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이미지가 제작, 전달, 소비되었었다. 그 대부분이 사용자가 직접 손으로 돌리고 작동해가며 감상하는 장치였고,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물론 인터랙티브 이미지였다. 그때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시네마토그래프=영화의 등장과 함께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박물관으로 들어가 버리고, 20세기의 영상문화는 많은 사람들이 프레임 내부에서 표현되는 사건을 관객으로서 감상해야 하는 패러다임 안에 갇히고 만다. 그것은 캔버스와 원근법의 전통, 혹은 책(book)의 문화를 계승하고 오히려 강화한 새로운 버전일 뿐, 다양한 가능성이 탐험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기형적인 전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마디로 20세기는 프레임 내부의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원근법적 전통을 계승한 패러다임에 갇힌 문화가 과도하게 시각문화를 지배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현대의 미디어아트는 사상(事象)을 기록, 전달, 재생하는 다양한 미디어=기계적 프로세스의 통합이 실현되고 그것들의 연출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중첩시키고, 그것을 향한 시선의 방식을 갱신한다. 이미 세상에 수많은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또 하나의 백화제방의 시대를 열고 있다.
김태은 작가의
김태은씨의 작품에는 두 가지 방식의 대칭성이 눈에 띈다. 첫 번째는 가시적인 기계적 장치 혹은 구조물과 대비되는, 스캔/기록/컴퓨팅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 프로세스의 대칭, 그리고 또 하나는 인터랙션이 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닫힌 서사’ 영역의 대칭이다. 이러한 관계를
하지만 또 이 전체의 프로세스는 조금만 이 테크놀러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상황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가시적이다. 그리고 이 기묘한 간격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인식의 노동‘을 촉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미디어아티스트들의 작업은 주로 이런 포인트에서 이전의 영화와 구분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영상이미지를 통해 표현, 전달, 소비하는 세계의 폭을 확대하고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이 테크놀러지를 ‘로우테크’(low tech)와 ‘하이테크’(high tech), 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로 구분하는 일 보다는, 이 대칭적 요소들이 통합되어 단 하나밖에 없는 유니크 테크(unique tech)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술사(技術史)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인터랙션’과 ‘닫힌 서사’ 영역의 대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터랙티브 영상은 이미 상호작용성과 영상이라는 두 개의 단어의 조합에 있어 이미 모순이 된다. 편집되고 저장된 허구는 보는 사람이 허구를 인정하는 것을 서로 약속하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내러티브 구조에 대한 상호작용성은 이미 영상의 개념을 위반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이 향후의 예술가들에게 남겨진 미션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끔씩 장난이 진짜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있듯, 우리의 뇌(腦)는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서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혼돈하기도 한다. 또 연결과 상호작용은 명료한 이성에 의해 서술된 내러티브보다는 개방적인 의미와 새로운 문법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someday, Scene Keeper, Triad Building Unwrapped, Easel Painting 등에서도 그러하지만, 인터랙션은 매우 제한적이고 결과적으로 그 너머의 영상/영화적 서사가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두 세계가 연결고리가 없는 채 병치됨으로써, 영화적 서사와 인터랙션의 관계가 단절되고, 작품전체의 내러티브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채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질문해 보고 싶다.
여전히 ‘상호작용적 예술의 내용이 공허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이 작가에게서처럼 다영역적 경험이 축적/성숙된 곳에서 비로소 새로운 혁신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향후 김태은 작가에게서 자신에 의해 태어난, 또는 앞으로 태어날 독특한 장치(unique tech)들의 빈 곳을 채울 탐험이 기대된다.